최근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라는 일종의 인문/교양(?) 서적이 한국에서 꽤 많은 독자들에게 각광을 받고 있는듯 하다. 마흔에 겪을 만한 고난 혹은 위기에 대해 어떻게 현명하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서 같은 책인 것 같은데 문제는 책 제목이다. 내용만 봐서는 전혀 이 책이 “마흔” 혹은 “쇼펜하우어”라는 키워드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출판사 리뷰에 따르면 “마음의 위기를 다스려야 하는 마흔에게 필요한 철학수업” 이라고 적혀져 있다. 마음의 위기는 마흔만 다스리나? 오랜만에 호탕하게 웃었다. 마흔에게만 절대적으로 필요한 철학이라는게 대체 뭘까? 스스로에게 질문한다. 이런 철학수업도 있었나? 매우 혼란스러웠다. 어느 구매자의 리뷰에서 참으로 공감을 얻었다. “딱히 마흔과 관련이 없는 책인데 제목을 그렇게 지은 것 같습니다. 그냥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을 쇼펜하우어 이름을 빌려 말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네요. 개인적으로 자기계발서를 좋아하지 않아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철학책이라기 보다는 자기계발서에 가까운 것 같았고 그래서 저는 많이 실망했습니다. 마흔 살의 어려움을 극복해보고자 샀는데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던 것 같네요.” 휴우, 나만 혼란스러웠던것은 아니였던 것 같다. 한국사회 안에서 철학을 바라보는 관점, 인식은 예전에 다룬적이 있어 (“철학원의 두 얼굴”) 굳이 이 글에선 다루지 않겠다. 이 글에서 크게 다루고 싶은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라를 막론하고 다수의 사람들은 왜 철학이라는 학문을 나이가 들어서 해야하는 것처럼 인식할까? 철학을 학문으로서 공부하고, 철학에게 위로를 받고 등등…꼭 나이가 들어야만 찾는 학문으로 착각하는것일까? ‘지식을 사랑하라’는 철학의 그리스언어의 어원에 따라 지식을 사랑하라는 말을 지식이 좀 쌓은다음 접하라는 뜻으로 오해하는걸까? 철학을 배우기위한 혹은 접하기 위한 일종의 관문중 하나가 나이가 좀 있어야 하는걸까? 철학이라는 학문을 통해 사고력, 논리력 혹은 생각의 깊이와 같은 공부/학습에 꼭 필요한 스킬들을 배울수 있는데, 이 좋은걸 왜 조기교육화 하지 않을까? 철학이라는 학문이 본질적으로 접근성이 쉽지 않다는거 인정한다. 철학서적 및 대부분 철학자들의 주장이 심오하고 10번 이상 읽어도 확 와닿지가 않고 긴가민가 할때가 그렇지 않을때보다 많다. 플라툰, 니체, 데카르트등 대부분 우리에게 나름 익숙한 철학자들의 주장들이 담긴 책은 하나의 주제만으로 구성된 두꺼운 한권이 아닌 여러 상대적으로 짧은 글들이 모여 하나의 책으로 합쳐져 구성되어 있다. 미국 대학교에서 철학 전공자들이 철학수업을 들을때 평균적으로 다른 인문학전공 (예컨데 역사 혹은 영문학) 수업에 비해 읽을게 적다. 양보다는 깊이로서 한 문단 (평균적으로 6-11줄) 혹은 몇 안되는 문단들을 인간이 들어갈수 있는 최대 깊이로 들어가 고뇌하고, 질문하고, 토론하고, 분석한다. 당연히 사고력과 논리력이 자연스럽게 향상될 수 밖에 없다. 오히려 이러한 스킬은 어릴때 부터 길러야 하는 것이 마땅치 않을까?조기영어, 조기수학, 조기유학 등 필요한 기술, 학문 혹은 경험 앞에 “조기”라는 단어를 붙여 조금 이라도 일찍, 조금 이라도 어릴때 배우거나 경험하기를 장려한다. 어린 학생들의 사고력 혹은 논리력 향상을 위해 철학이라는 학문이 필요하다는 것은 앞서 설명했듯이 두말하면 잔소리다. 철학은 따뜻한 격언을 통해 어른들의 아픈 마음의 상처를 위로 혹은 치료해 주는 학문이 아니다. 힐링캠프가 아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라는 식의 달달한 표현으로 포장하는 포장지가 아니다. 철학은 날카로운 이성과 논리적인 체계를 가지고 타당한 주장을 하고, 반론하고,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질 높은 지식의 깊이와 이해를 달성하는 지적활동 이다. 그러한 지적활동을 통해 결과적으로 더욱 더 인간적으로 숙성된다. 마흔을 위한 혹은 이십대를 위한 철학따윈 없다. 나이든 사람을 위한, 나이든 사람이 하는 학문 이라는 다소 불편한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철학.” 학생들이 만기(滿期)철학 하지말고 조기(早期)철학 하는 그 날이 올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