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 기회가 되어 한국에 방문 한적이 있다. 대부분의 유년시절을 미국에서 보낸 나는 한국 방문에 대해 매우 설렜던것으로 기억한다. 삼겹살, 눈치, 절, 산, 부지런함 등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것들이 한국에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 방문중에 조금 생소한 것이 나의 마음과 생각을 혼란스럽게 했다. 길을 걷다 보니 “철학원” 이라고 쓰여진 간판이 생각보다 꽤 많이 자주 보였다. 철학원 이라고 쓰인 글귀 아래 약간 작은 글씨로 사주, 운세, 궁합, 작명, 토지 등 다소 생뚱맞은 부주제가 자리 잡고 있었다. 심지어 어떤 철학원은 타로, 궁합 이라는 더욱 더 이해 안가는 단어들이 보였다. 철학원? 철학을 배우는 학원인가? 철학을 배우는 학원이랑 운세랑 무슨 관계가 있지? 한국사람들이 이렇게나 철학에 대해 관심이 있다고? 소크라테스가 참 좋아했겠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철학원은 내가 알고 있는 철학과 전혀 관계없는 곳이었다. 일종의 역술가 (소위 한국판 fortune teller)가 사람의 얼굴 (관상), 손금, 띠, 이름, 생일 등 개인정보 또는 개인특성을 가지고 그 사람의 미래, 성공, 부 등에 대해 조언을 하는 곳이라고 보면 되겠다. 역술원 이라고 하면 되지 왜 굳이 상관없는 철학이라는 단어를 사용할까? 당시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있던 나는 적지 않은 문화충격을 받았다. 고대 아테네에 위치한 웅장한 플라툰의 학교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순대 국밥집 옆 혹은 허름한 상점 옆에 위치한 철학원들을 보며 묘한 감정이 들었다. 한국에서의 철학은 사주, 운세 혹은 궁합같은 대학 과정에서 배우지 않았던 새로운 영역이였다. 허름하고 낡은 상가에 위치한 한국의 ‘철학원’을 보며 철학이라는 논리에 기반되며 이성적인 학문에 심취해 있던 한 철학도는 슬픔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것이 철학이라는 학문이 한국사회에서 많이 생소하고, 낯설고, 추상적으로 받아진다는것 인정한다. 한편으로는 역술가들이 철학원을 상호로 정할만 하다. 역술원이라고 대놓고 비과학적인 분야를 다룬다고 하기에는 너무 직설적이고 철학이라는 단어뒤에 숨어서 간접적으로 애매모호하게 어필하고 싶었을 것이다. 한국사회에서의 철학은 이성적인, 과학적인 학문보다는 미신적이며 유교 혹은 종교에 기반한 학문으로서의 인식이 보편화 된거 같다.철학은 종교를 다루는 것도 아니고, 미신을 다루는 학문이 아니다. 더욱이 수익이 많이 날 수 있는 땅이 어딘지 알려주는 학문은 더더욱 아니다. 철학은 철저히 논리에 기반되어 인간으로서 할수 있는 가장 이성적인 사고를 할수 있게 도와주는 학문이다. 모든 학문에는 철학이라는 양념이 있다고 볼 수있다. 미술철학, 과학철학, 스포츠철학, 물리철학, 의료철학 등 모든 학문분야에 철학이라는 양념을 첨가할수 있다. 첨가된 철학이라는 양념은 해당 학문 맛의 깊이와 풍미를 더욱 더 진하고 풍부하게 도와준다. 철학은 단순히 표면적인, 실질적인 지식의 깊이를 넘어 본질적인 뿌리까지 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지식의 깊이를 쌓는 행위. 마치 되돌아 가는, 퇴보하는, 되새김질까지 하는 느낌을 준다. 다이나믹하고, 실질적인, 삶의 진보적인 추세를 선호하는 요즘 유행하는 학문들하고는 매우 대조적이다. 철학이 한국에서 홀대받는 첫번째 이유다. 격변하고, 다이나믹하고, 급한 한국사회에서 철학은 불필요한, 왜 굳이? 정도 급의 학문이다. 철학이라는 학문의 중심에는 논리가 있다. 논리 없이 철학을 할 수 없다. 철학에서 모든 주장은 전제에 기반된 결론을 통해서만 그의 합리성과 정당성이 인정된다. 과학과 다르게 관찰 혹은 실험을 통하지 않아도 모두가 공감할수 있는 논리를 가질수 있다. 예컨데, 다음 두 전제가 있다고 하자. (A) 모든 사람은 죽는다. (B)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이 두 전제를 가지고 다음과 같은 결론을 유출할수 있다. (C) 고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 이처럼 관찰과 실험없이 전제만 가지고 타당한 결론을 낼수 있다. 서양에서의 철학은 이처럼 논리가 중심이 되어 체계성있는 이성적인 학문으로 거듭났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한 서양철학자들 (예컨데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리스, 칸트, 데카르트, 니체 등)은 논리에 기반된 철학적인 사고를 통해 인류를, 인간을 더 이해할수 있도록 철학적인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한국은 다르다. 전통적으로 미신 (예컨대 무당, 역술가, 점쟁이 등)과 감성에 치우친 사회 그리고 이러한 풍토현상 때문에 논리성, 이성을 요구하는 서양철학이 아쉽게도 설 자리가 없다. 철학이 한국에서 홀대받는 두번째 이유다. 예컨대 학교에서든 일터에서든 혹은 길에서 사람들과 의견 충돌이 생겼을 때 논리적으로 의견을 좁히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대부분 문제를 받아들이고 답을 접근하는 방법이 이성보다는 감성에 매우 치우쳐 있다. 또한 믿음의 출처를 과학적인 근거나, 논리적인 사고를 거치지 않고 말 그래로 믿음 (Faith) 이라는 단어에 지나치게 의존해 믿고 더 나아가 맹신하고 있다. 한국사회에서 무당 (Shamanism)의 영향력이 막강한 이유다. 내가 한국 방문에서 접한 철학원. 진짜 철학과는 아주 무관한 것을 하는, 가짜 철학을 하는 곳이었다. 아니 가짜 철학도 아니다. 사주, 운세 궁합등을 풀이해 주는 역술가를 어찌 철학자 그리고 그가 행하는 행위를 철학이라고 볼수 있을까. 논리성이 없는. 이성적이지 않은. 믿음을 전부로 행하는 행위. 역술과 다르게 철학은 미래를 알 수 있게 풀이해 주는 학문이 아니다.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최소한의 논리성을 가지고 현재를 현명하게 살수있게 도와 주는 학문이다. 철학원, 아니 역술원이 진정으로 철학을 하게 될 날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