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살다 보면 눈치 라는 녀석의 빈자리를 매순간 느낀다. 행정업무를 위해 공공기관을 가도, 개인적인 업무를 위해 상점을 가도, 일반적인 혹은 비지니스에서의 인간관계를 봐도 대부분 눈치라는 것이 공식에 빠져있다. 법과 규칙이 곧 예의, 예절, 에티켓인 미국이라는 사회에서 눈치라는 녀석은 눈치만 보고있다. 공공기관에서 일하는 직원들, 일반 상점 직원들 혹은 학교나 그 외에 전반적인 단체들에 속해 있는 사람들. 대부분 하나같이 답답하다. 딱히 법과 규칙을 따르는 것 같지도 않다. 개인의 취향과 독립성이라는 포장지로 그들의 답답한 행위를 아름답게 포장하지만 내가 봤을 때는 그냥 나태함과 무기력함의 그 자체다. 사회의 질서와 평화를 유지하는데 인간의 나약함과 게으름을 전제로 한다면 미국사회 구성원들은 노예나 감옥에 갇힌 죄수들과 다를게 뭐가 있을까? 생각을 딱히 안하고 그럴싸한 행위를 하지않는게 미국이라는 법치국가에서는 덕이요 혹은 도리 일지도 모르겠다. 눈치라는 한국말과 같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영어 단어는 없다. 근접한 표현으로서는being conscious of others 정도 일텐데 이건 단어가 아니고 구(phrase)이기 때문에 적합하지 않다. 또한 본질적으로 한국어는 영어와 달리 한 단어가 일반적으로 추상적인 혹은 포괄적인 뜻을 갖기 때문에 눈치 라는 뜻이 being conscious of others 만을 내포하고 있지는 않는 거 같다. 본능적이면서 생존을 위해 인간은 스스로에 대한 지각 뿐 아니라 그와 동시에 타인 등 외부의 요소들도 동시다발적으로 지각 및 식별을 해야하기 때문에 어찌 보면 눈치 라는 것은 심장이 스스로 알아서 뛰는 것처럼, 딱히 생각하지 않아도 저절로 알아서 된다고 보면 된다. 이 자연스러운 현상의 산물인 눈치를 바라보는 한국사회의 전반적인 시선은 다소 차갑다. 왜 다른 사람 눈치를 봐? 눈치 보지 말고 너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등등 눈치를 다소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본다. 반면 일터에서는 소위 눈치 없는 직원이 미움을 받곤 한다. 적절한 트레이닝 혹은 가이던스를 하나부터 끝까지 알려주지 않아도 그저 알아서 눈치껏 하는 직원은 사랑을 받는다. 이건 한국이나 미국이나 별반 차이가 없는 거 같다. 일터에서 만큼은 아니 공적이든 사적 일을 처리 할때 일종의 센스 정도의 급으로 인식하는 눈치. 한 각에서는 미덕이요, 다른 한 각에서는 악덕이다. 적용성 혹은 큰 맥락을 떠나서 보았을 때, 눈치 라는 녀석 자체는 우리 인간에게 매우 자연스러운 것, 꼭 필요한 존재이다. 법치국가 미국사회에서 매우 중요시 하는 이른바 매뉴얼화된 규칙들은 때론 매우 답답하고, 사회구성원들을 기계 혹은 노예로 만들고, 더 나아가서 위험에 빠뜨리기 까지 한다. 큰 위급상황 혹은 나라 재난 (예컨대, 총기사건, 테러 등)이 터졌을때 매뉴얼 혹은 포로토콜로만 기반된 상황처리 방식은 더 큰 위급상황을 초례하거나 피해를 최소화 하는데 부적절 및 실패의 원인이라고도 생각할수 있다. 크게는 커먼센스에 기반된 눈치가 위험을 직면 했을때 더 효과적인 프로토콜로 작용 할수 있다. 매뉴얼 때문에 시간이 지연된 경찰들에 대응. 그로 인해 더 많은 사상자가 생기는 경우. 대부분 총기사건의 결말이 그렇다. 마치 더 많은 인명피해를 기다리는 건지. 줄에 사람이 없는데도 고객을 맞아주지 않는 항공사 직원, 알고 보니 본인은 오늘의 응대 고객 수가 일정 수를 넘었기에 더 이상 업무의 의무가 없기 때문에 스마트폰으로 게임하고 있던 직원. 누구를 위한 매뉴얼 이고, 뭐가 효율성인지 잘 구분이 안된다. 법치국가 미국사회에서 절실히 필요한 건 효율성, 체계도 아니다. 눈치다.